본문 바로가기
닷닷의 사건사고 리뷰/[사건사고]

- '무등산 타잔 박흥숙' 망치로 성인4명을 처참하게 살인했던 [가난함의 비극]

by 닷닷 2022. 1. 12.
728x90

무등산 타잔 박흥숙

 

728x90

 

안녕하세요 티스입니다! 오늘의 사건사고는 무등산 타자 박흥숙의 살인사건인데요. 조금은 서글프기도 한 이번

 

사건사고 시작해보겠습니다. 박흥숙의 출생은 전남 영관군인데요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형도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부터 원래도 가난했던 가세가 급격히 아주 기울었다고 합니다. 박흥숙은 홀어머니와 남은 동생들을 잘 돌보는

 

굉장한 효자였고 박흥숙을 알던 주위 사람들은 그를 다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흥숙의 초등학생

 

시절의 생활기록부에서는 비상함과 똑똑함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 있었고 찢어지게 가난함도 생활기록부에도 

 

잘 적혀져있었다.난으로 인해 가족이 흩어지면서 어머니와 막내동생은 절로 가서 수발을 들며 허드렛일을 하며

 

연명했고, 그의 여동생은 남의 집의 식모로 일을 하며 살게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박흥숙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그의 최종 학력은 국민학교였다. 그가 남긴 일기에 의하면 "바라던 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우리집은 가난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며 당시 그와 그의 가족들이 겪고 있던 사정을 우리에게 전하고있습니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

 

그는 중학교에 입학해야 할 나이에 광주시내에서 열쇠수리공으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인지, 주경야독을 하여 다섯달 후 검정고시에 합격했다고

 

그의 여동생과 그의 일기는 증언했고 검정고시로써 고등학교 과정을 통과한 그는 곧바로 사법고시를 준비했다고합니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법관이 되면 가난을 벗어나 흩어진 가족들을 모아서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그가 자신의 거처로 삼은 것이 무등산인데요.

 

그는 무등산 산자락으로 들어가서 움막집을 세우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았으며 당시 무등산

 

자락 주변에는 스무여 가구가 빈민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주민들이 박흥숙과 그의 가족이 굶주림에 허덕이면

 

자신들의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산중턱에 있는 무당의 집에서 무당의 수발을 들고

 

허드렛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박흥숙

 

1977년 4월 20일 운명의 그날. 이 날 광주시 동구청 소속의 건설반장인 오종환 반장과 철거반원 일곱 명이 무등산을

 

올랐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등산이 아닌 바로 이 일대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기 위한 산행이었는데

 

마침 그즈음에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구청에서 판자촌 주민들에게 앞서 알려 나머지

 

집들을 철거된 상태였지만, 갈 곳 없는 여덟 가구의 집들만 남은 상황이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남은 사람들은 운명의 그날까지 차일피일 철거를 미루며 버티었던 것이었죠.

절박한 박흥숙과 또한 다른 의미에서 절박한 철거반원 사이에 시비가 붙었는데, 철거반원 중 일부가 어머니를 밀치며

 

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사 결과와 증언에 의하면, 이때까지 박흥숙은 어머니를 말리면서

 

"저 사람들도 위에서 시켜서 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라며 그들을 동정하였다고 합니다. 나아가 철거반이

 

가재도구를 모두 움막집 바깥으로 옮길 때 박흥숙도 그들과 함께 가재도구를 옮기면서 철거를 협조했습니다.

그런데 살인사건의 시작은 철거 반원들이 집에 불을 지르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집 지붕에는 박흥숙의 어머니가

 

무당의 집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 30만 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강력하게 항의했는데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 박흥숙



여기까지는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은 그가 네 명의 철거반원들을 살해한 결정적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움막집으로부터 삼백 미터 정도 떨어진 집에는 김복천과 그의 처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 박흥숙은

 

"저 집에는 병에 걸린 노부부가 살고 있으니 선처해달라."라는 요청을 했고 철거반원은 이를 수락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결국 그 집이 불타는 모습을 본 박흥숙은 엄청난 적개심과 분노에 사로잡혔고,

 

결국 넘어선 안될 강을 건너고 말죠... 이에 대하여 박흥숙은 따져 물었는데, 철거반장 오종환은 "어린놈이 지랄한다."

 

라며 박흥숙을 깔보았고, 더욱 분기가 탱천한 박흥숙은 철거반장 오종환을 향하여 자신이 만든 사제 공기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그가 사제 총을 만들 수 있던 연유는 바로 그가 열쇠공을 시작으로 금속을 다루는 일을 배웠기

 

때문이었는데요. 총을 든 그는 철거반장에게 부하 반원들을 모두 모으라고 위협을 가하여 철거반원 7명 중 5명이

 

불려왔고, 박흥숙은 여동생에게 지시하여 철거반원들을 묶게 하였다. 당시 그가 이들을 결박한 이유는

 

이 사람들을 결박하여 도망가지 않게 한 뒤 그는 스스로 시내로 가서 당시의 광주시장에게 따지고 싶어서였다고 합니다.

박흥숙은 포박한 철거반원들을 자신의 공부방으로 파 놓았던 구덩이에 넣은 다음, "불태운 우리 집에 사과해라"라고

 

호통을 쳤는데, 이 와중에 철거반원들은 마침 헐겁게 묶여 있던 포박을 풀고 반항하였고,

 

박흥숙은 망치로 그들을 공격해서 5명 중 4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xT74LSr0yE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