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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닷의 사건사고 리뷰/[사건사고]

- '일본사에게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했던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by 닷닷 2022.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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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는 1600년 10월 21일 일본 미노국 세키가하라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일본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전투 주 하나로 꼽히는 이 전투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한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한 동군의 내전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지배권을 두고 일어난 전투입니다.

 

이 전투의 승자에게는 향후 265년간 일본을 지배하는 권력이

 

패자에게는 죽음과 가문의 몰락이 기다리고 있기도 했던 전투로

 

양군을 통틀어 17만이라는 대군이 맞붙었고 역사적으로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게한 전투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전투가 진행된 시간은 단 3시간에 불과하였습니다.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에도 막부가 수립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에도 막부는 임진왜란 이후 나빠진 조선과의 관계를

 

상당히 개선하는데 성공하고 다수의 다이묘들의 영지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멸문지화 되는 등

 

큰 파급효과가 일어나게 된 전투입니다.

 

워낙 일본사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투인지라 오늘날에도 세키가하라는

 

일종의 중요한 승부처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합,사건 등을 가리키는 관용구로도 사용됩니다.

 

 

천하를 거머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가문의 입지만 놓고 보면 썩 좋은편이 아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도 출신이 미천하여 그를 뒷받침해줄 지역적, 인적, 기반은 없었는데

 

그렇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동들로 구성된 칠본창과 자신의 가신 출신들로 오봉행을 구성하여

 

행정적 입지를 다지고 자신의 인척을 양자로 보내거나 타인의 자식을 자기의 양자로 삼아 기반을 다지려는 노력을 했고

 

이런 노력 덕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거물들이 생존하기는 했으나 당시에는 그들을 제어할 충분한 힘이 있었습니다.

 

다만 도요토토미 히데요시의 예상과는 달리 칠본창과 오봉행간의 대립이 있었고

 

이는 도요토미 가의 내분을 야기하였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 당시 이들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고

 

그런 와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0이 다되어가는 나이에 적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을 얻게 됩니다.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행운이었지만 도요토미 가에는 불행이었는데

 

당시 이미 후계자로 임명된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있었고 입지를 공고히 다져야하는 상황에서

 

적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탄생으로 오히려 위험 요소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위험요소로 전락해버린 히데츠구는 숙청을 당하는데

 

숙청을 당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매달리며 무죄를 증명하기위해 독대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출가까지 하였음에도 끝내 할복을 명 받아 죽어야했습니다.

 

이로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민심은 땅으로 떨어졌고 많은 다이묘들이 등을 돌리게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1598년 이후 무장들의 복귀로 양측의 갈등은 심해졌지만

 

당시에는 최고 원로였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직접 중재를 하며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켰지만

 

마에다 토시이에마저 1599년 사망하자 양 세력은 의견 대립이 아닌 창칼의 대결로 변모하였습니다.

 

 

야심을 들어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름난 다이묘들을 포섭하였고

 

이시다 미츠나리 역시 반 이에야스 세력을 규합하여 이에야스와의 승부를 준비하였습니다.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하였고

 

이로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수립되고 조선 및 명나라 외교관계 개선등에 영향이 있었습니다.

 

본래 82000명이던 동군은 후반부 서군의 병력들이 배신을 하고 넘어와 104000명이 되었지만

 

120000명이던 동군은 무려 20%정도가 배신을 하여 후반부 98000명의 병력이 되었습니다.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들었던 영주들은 막대한 이익을 보았으며

 

칠본창의 생각대로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충신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를 죽이는 등 씨를 말렸고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릐 최종 승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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