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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닷의 사건사고 리뷰/[사건사고]

-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 열사]

by 닷닷 2022.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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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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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의 사건사고는 평화시장의 재단사였으며 대한민국의 최초의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사건입니다!

 

1960년대 평화시장의 봉제 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 권리를 위해 노력하다 노동자의 열약한 현실을 알리고자

 

박정희 정부와 자본기업들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22세 나이로 근로기준법 법전을 손에 쥔채 

 

분신자살한 사건인데요! 전태일 열사는 1948년 대구 남산동에서 2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착한인성과 다정다감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기질의 인물이였다고

 

전해지는데요!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전태일의 집안은 어렸을 때부터 정말 너무 찢어지게 가난했었는데요

 

부산으로 이사갔다가 서울로 이사온 후 아버지가 봉제 공장을 차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생활을 이어간적도

 

있지만 거액사기를 당하는 통에 온가족이 다시 구렁텅이로 빠졌었죠 어쩔 수 없이 초등학교 마저 중퇴하고

 

17세에 무일푼으로 평화시장에 재단사의 시다 즉 재단 보조로 취직하게 됩니다! 전태일은 빠른 일처리와

 

뛰어난 실력으로 직장에서 큰 인정을 받고 단기간에 재단사로 승진하며 다른 재단사 친구들과 힘을 모아 

 

자기만의 가게를 가지는 소박한 꿈이 있는 청년이었죠!

 

전태일 열사 동상

 

소박한 꿈을안고 재단사로서 일을 열심히 하던 중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시다 한명이 심하게 기침을 하다 각혈을 하는 걸 보고 병원에 가라고 도움을 청하러 하나

 

그 병을 알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여공의 모습과 얼마 뒤 병에 걸린 여공이 해고된 걸 보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재단 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박봉, 질병으로 시달리는 현실에 충격을 먹고 보조 여공들을

 

돕는 것은 물론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태일 사진을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그 이후 전태일은 같이 재단사를 하는 친구들을 모아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여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신념을 

 

가진채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데요! 청계천 피복 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노동 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제출하여 경향신문에 실리면서 평화시장의 실태가 들어나게됩니다. 정말 어떻게 보면 전태일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홍보수단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사업주들과 협의를 벌이기도 했으나 현실에 큰 벽에 막혀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이후로 정부는 산동친목회를 조직한 전태일을 요주의 인물로 낙점했으며 항상 감시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또한 사회주의 조직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이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그럴싸한 근로기준법이 있었으나 형식적이었으며 감독 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 하지 않았으며 증언에 의하면 전태일 일행이 찾아가자 알았으니 며칠만 기다려라해서 

 

며칠뒤에 다시 찾아갔더니 "감사가 끝났으니 이제는 알아서해라 이 발갱이 새끼들아"라는 폭언이 돌아왔다고합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中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청계천 앞에서 그저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시작도 하기 전에 경찰과 고용주 측에서 동원한 패거리들에 의해 짓밟히고 말죠. 또 한번

 

절망한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남쪽에 자리한 동화시장 계단에서 한참을 생각한 끝에, 몸에 휘발유를 끼얹기 시작했죠

 

. 그리고 법전과 자신을 불태우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쓰러집니다...

이후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미 엉덩이를 제외한 전신에 3도 중화상을 입은 상태인데다

 

 병원 측에서도 환자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응급 치료 이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치료를

 

받고 싶으면 근로 감독관에게 보증을 받아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근로 감독관마저 치료를 위한

 

돈 보증을 거부했다. 결국 그는 명동성모벼원으로 옮겨졌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병상에서 곁에 있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1970년 11월 13일 밤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jBaR42Z4dc 

https://www.youtube.com/watch?v=PGIF1FA9jY8 

https://www.youtube.com/watch?v=JaZ8LJMKm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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