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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닷의 사건사고 리뷰/[사건사고]

-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박열]

by 닷닷 202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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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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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1902년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가난했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박열은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에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하여 3.1운동과 관련되어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들과의 

 

폭력시비였다고 하는데요 박열은 일본인들의 우리나라 사람들을 학대하는것을 참을 수 없었으며 정의로움 그자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인데요 그 뒤로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을 배달하면서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1923년 4월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 도움을 받아 여러 동지와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여

 

일본에서 반일 활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습니다! 정말 일본의 한 중심에서 이런 활동을 대범하게 한다는것이

 

거의 사형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던 중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지진은 조선인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조선인들을 학살하여야한다라는 황당한 입장을 내놓았으며 국민들은 일본정부에 혹하여

 

조선인들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는데요 박열은 이전부터 독립운동을 위하여 폭탄을 구매하였는데 일본인 경찰은

 

박열을 이 관동대지진 사건이 혼란한 틈을타 보호 감속이라는 명목으로 박열을 체포했습니다. 일본 경찰에 의한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매 계획이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것을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날조하고 과장하여 보도하였다고 하는데요 이것을 박열의 대역 사건이라고 합니다. 

 

박열과 그의 아내 후미코

일본 경찰은 박열을 폭탄제조 혐의로 재판을 열게 되었는데요 이때 제판 과정에서 보인 모습도 완벽하게 

 

대범하였습니다. 박열과 그의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는 재판장 안에서 조선 옷을 입겠다고 당당하게 말했으며

 

첫 공판 당시 박열은 옛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관대를, 가네코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을 하였다고합니다.

 

박열도 대단한 대한민국 독립군이지만 그의 아내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도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나라가 잘못됐다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박열과 함께

 

조선의 편에 선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므로 재판도 조선말로 할 것이니 통역을

 

허락하라고 소리쳤다고합니다. 두 사람에게는 1926년 3월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고

 

하는데요 이 무기징역도 너무 당당한 태도를 취한 박열을 의식한 일본이 일본의 너그러움을 보여주겠다며 일방적으로

 

제시했다고 하는데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처사였습니다. 그리고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도움으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결혼을 하였다고합니다. 하지만 후미코는 옥중에 무기징역을 받고 수감생활을

 

이어가는중 자살을 했다고 알려졌는데요  그게 정말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아직까지도 밝혀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지나 박열은 10년 20년 일본의 감옥에서 생활을 하던 중 일본의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미국에게 일본은 항복을 하게되는데요 그날이 바로 우리나라의 독립이였습니다.

 

박열 영화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일본 아키다 감옥에서 22년만에 석방되었는데요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이후 도쿄로 

 

돌아와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였고 김구 선생에게 부탁받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 송환작전을 맡아

 

책임지고 완수하였습니다. 이후 반공주의 노선의 신념을 밝혔고 신조선건설동맹은 타 우파 단체들과 통합되어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이 발족하였다고 하는데요 박열은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추대되었다고합니다.

 

다만 박춘금 항목에 의하면 당시 민단은 구 친일파나 파시스트들이 제법 많았으며 박열은 초대 단장이 되었지만

 

이들과 갈등 끝에 결국 단체를 나갔다고 전해집니다. 1948년에는 한국으로 귀국하였는데요 다음년부터도는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 계속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되고 전쟁 도중에 납북되었다고

 

전해졌는데요 일설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 진주한 북한 보위부가 납치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 정확한 이야기는

 

여기는 지금 위험하니 우리가 모시겠다고 꼬셔 북한으로 데려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박열은 주위의

 

피난 권고에도 국민이 모두 서울에 남아 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사람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며

 

끝가지 서울에 잔류하겠다고 하였다고합니다. 아마 이것이 뜻대로 되지않아 평양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북한으로 넘어간 후에 6.25전쟁 휴전 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하였고

 

비교적 최근인 1974년 1월 17일에 평양에서 71세로 사망하였습니다. 박열은 그누구보다 용맹하였으며

 

존경받아 마땅한 우리나라의 독립투사입니다. 그의 업적은 후세에 역사로 남겨서 가슴속에 영원할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0FhaAHdCUc 

https://www.youtube.com/watch?v=NaXROGpUcwk 

https://www.youtube.com/watch?v=LSJCcqx90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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